미·중 양국의 패싸움은 거대한 체스판을 연상케 한다.
국제 정치의 무대는 언제나 정교하게 짜인 도미노 판과 같다. 4년째 접어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전선의 고착화 속에서 지루한 소모전으로 이어지고 있고, 중동에서는 호르무즈 해협을 둘러싼 미국과 이란의 충돌이 종전협상으로 갈지 귀추(歸趨)가 주목받고 있다.
이러한 동시다발적 분쟁은 세계 유일 패권국인 미국의 외교적 집중력과 군사적 자산을 분산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미국이 ‘양면 전선’의 늪에 빠진 사이, 중국은 서해와 동중국해, 남중국해를 잇는 제1도련선(오키나와~대만~필리핀~말레이시아) 일대에서 거대한 화약고를 만들고 있다.
최근 대만 해역 주변에 중국 군함과 해경선 100여 척이 집결한 사건은 단순한 무력시위를 넘어선 지정학적 격변의 신호탄이다.
중국의 대규모 함대 기동은 고도화된 ‘회색지대 전술’인가?
중국이 전개하고 있는 대규모 함대 기동은 당장 전면전을 일으키겠다는 선전포고는 아니다. 이는 평시와 전시의 경계를 모호하게 흐리며 상대의 방어망과 심리를 서서히 무너뜨리는 고도의 ‘회색지대 전술’이다. 중국은 군량미나 대규모 병력 이동 같은 명확한 전면전 징후 대신, 상시적인 순찰과 군사훈련을 빙자해 주변국의 피로감을 극대화하고 있다.
대만 방공식별구역(ADIZ)을 수시로 침범하고 해상 봉쇄 훈련을 정례화하여 대만 사회에 고립감을 심어준다. 한반도와 인접한 서해까지 수십 척의 함정을 상시 배치함으로써, 유사시 미군 등의 외부 전력이 진입하는 것을 원천 차단하는 다차원 방어망 능력을 실전 수준으로 과시하고 있다.
미국의 ‘꽃놀이패’와 중국의 ‘성동격서’
미·중 양국의 패싸움은 거대한 체스판을 연상케 한다. 서태평양의 패권을 쥐기 위해 양국은 서로 다른 셈법으로 치밀한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우선 미국의 전략은 직접적인 군사 파병 없이 대리전을 지원하는 일종의 ‘꽃놀이패’ 형태를 띤다. 미국은 유럽과 중동의 분쟁을 통해 우회적으로 러시아와 이란의 국력 소진을 유도하는 한편, 이를 명분으로 나토(NATO)의 결속을 다지고 한미일 안보 협력을 전례 없는 수준으로 강화하고 있다. 전 세계적인 동맹 네트워크를 촘촘히 엮어 장기적으로 중국을 옥죄는 거대한 포위망을 완성하겠다는 계산이다.
이에 중국은 미국의 시선과 군사력이 분산된 공백기를 정확히 포착하는 기회주의적 ‘성동격서’ 전략으로 맞대응하고 있다. 미국이 유라시아 서편의 급한 불을 끄느라 인도태평양에 집중하지 못하는 틈을 타, 서태평양의 요충지인 제1도련선을 기습적으로 내해(內海)화하겠다는 속셈이다.
중국은 이 해역에서의 군사적 압박을 상시화하는 것은 서태평양에서 세력 균형을 뒤흔들고, 대만 및 주변 해역을 완전히 장악하려는 고도의 포석으로 보인다.
향후 제1도련선에서 전개될 시나리오와 우리의 대응
제1도련선에서의 충돌은 세 가지 시나리오를 예상할 수 있다. 첫째, 대만을 실질적으로 격리하는 ‘연착륙형 고사 압박’이다. 둘째, 스카보러 암초 등 남중국해와 서해에서 중국 해경선의 검문으로 촉발될 ‘우발적 군사 충돌’이다. 끝으로, 글로벌 공급망을 파괴할 ‘단기 속전속결 전면 침공’이다.
이는 우리의 생존과 직결된다. 블룸버그 이코노믹스는 중국의 대만 침공 시 한국의 GDP가 23.3% 감소하여, 대만을 제외하고 세계에서 가장 큰 타격을 입을 것으로 예측했다. 한국은 원유 등 핵심 에너지의 90% 이상을 이 남중국해와 대만 해협(SLOC)을 통해 수입하며, 해로 마비 시 하루에만 약 4,452억 원의 경제적 손실이 발생한다고 분석했다.
따라서 미국과 서방은 서해와 동중국해의 주도권을 뺏기지 않기 위해 단호한 지정학적 억제력을 구축해야 한다. 포성이 없는 위압도 침략임을 직시하고, 우리는 한미일 협력, 미·일·호·인 안보 협의체(Quad, 쿼드), 미·영·호 안보 동맹(AUKUS, 오커스)과의 해상 연대를 강화해 우리의 경제적 목줄인 해양 영토와 물류망을 사수해야 한다.
미·중 패권 시대, 전작권 전환 추진은 신중해야
전공의가 집도하는 수술실에 병원장이 들어와 “당장 ‘안보실’ 환자를 혼자 수술하라”고 지시한다면, 승진과 자리를 걱정해야 하는 의사가 “아직 숙련도가 부족하다”며 버틸 수 있을까? 군대라는 특수한 조직에서 현역 군인에게 ‘객관적 정책 검증’을 기대하는 것은 어쩌면 처음부터 성립할 수 없는 방정식이다.
인사권이라는 목줄을 쥔 통수권자가 답을 정해놓고 정책을 추진할 때, 서슬 퍼런 권력 앞에서 “조건이 미달했다”고 말할 현역은 없다. 우리는 이미 문재인 정권 시절 권력의 지시에 따라 군의 손발을 묶고 눈을 멀게 하는 항복 수준의 9·19군사합의 추진 과정을 목격한 아픈 기억이 있다.
전작권 전환은 ‘자주’라는 감상적 자존심의 영역이 아니다. 유사시 국민과 국가를 지키는 냉혹한 생존의 게임이다. 중공은 6·25 참전으로 대만 합병을 놓쳤다고 사후 분석을 했을 것이다.
지금의 중공이 내년도를 목표로 대만 합병을 시도한다면, 중공의 전략팀들은 미군 분산을 위해 북한을 사주(使嗾)하여 한반도 도발 카드를 들고 있지 않을까? 미중 패권 경쟁이 노골화되는 지금, 한미 연합사 해체를 부를 전작권 전환은 무모한 짓이다.
현재 국방부의 전작권 전환은 한미 연합사에서 근무한 예비역들과 민간 군사 전문가들로 구성된 ‘전작권 자문분과’를 만들고 맡겨야 한다. 정치를 배제하고 ‘국익과 생존’이라는 잣대만으로 전작권 전환을 검토하게 보장해야 한다.
정권의 눈치를 보지 않고 군사 상식과 양심에 따라 전작권 전환을 장기 과제로 추진하게 해야 한다. 건물의 안전 진단은 독립된 외부 감리사에게 맡겨야 부실 공사를 막을 수 있는 이치와 같다.
안보라인과 군은 국제정세를 직시해야 한다. 정권은 짧고 국가안보는 영원하다. 이제는 한미일을 필두로 역내 동맹국들과 어느 때보다 굳건하고 촘촘한 해상 안보 연대로 대응해야 한다. 힘의 균형을 유지하는 단호한 억제력과 흔들림 없는 한미일 결속력으로 파국적인 다양한 충돌을 사전에 막길 바란다.


◆ 박필규 위원
한미일보 편집위원
육군사관학교 40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