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5월 제주4·3 당시 중간산으로 대피한 주민들.
해방 직후 한반도는 정치 이전의 상태에 가까웠다. 일본이 물러난 자리에 국가가 즉시 들어서지 못했다. 행정은 비어 있었고, 치안은 불안정했다. 군대는 아직 단일한 지휘 체계를 갖추지 못했고, 경찰 조직도 정비가 끝나지 않았다.
좌익과 우익 단체는 경쟁적으로 조직을 만들었고, 일부는 이미 무기를 확보하고 있었다. 이 시기의 사회는 법으로 조정되는 공간이 아니라, 힘이 먼저 움직이는 공간이었다.
이 혼란은 전국적이었다. 그러나 모든 지역이 같은 방향으로 흘러가지는 않았다. 어떤 곳에서는 갈등이 제도 안으로 들어왔고, 어떤 곳에서는 총이 먼저 등장했다. 제주와 여수·순천은 후자의 경우다.
이 두 사건은 성격이 다르지만, 공통된 구조를 갖는다. 정치적 목표를 앞세운 무장 행동이 먼저 있었고, 그에 대한 국가의 대응이 통제되지 않은 폭력으로 커지면서 민간인 피해가 확대됐다.
제주 4·3: 섬이라는 조건, 조직된 무장 행동
해방 직후 제주는 행정적으로 취약했다. 섬이라는 지리적 조건 탓에 경찰 인력은 부족했고, 중앙 정부의 명령은 늦게 전달됐다. 이 공백을 파고든 것이 좌익 조직이었다.
남로당 계열 조직은 제주에서 빠르게 확산됐다. 마을 단위로 조직이 내려갔고, 비밀 모임과 연락망이 형성됐다. 이미 이 시점에서 일부 조직은 무기를 확보하고 있었다.
1948년 4월3일 전후, 남로당 계열 무장대는 동시에 여러 경찰지서를 공격했다. 이는 우발적인 충돌이 아니었다. 목표가 정해져 있었고, 시간도 맞춰져 있었다.
밤중에 공격이 이뤄졌고, 총과 화염병이 사용됐다. 경찰이 사망했고, 무기가 탈취됐다. 이것은 정치적 요구를 전달하기 위한 시위가 아니라, 무력을 동원한 반란행위였다.
이후 무장대는 산으로 들어갔다. 이른바 산악대가 형성됐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산과 마을은 분리되지 않았다. 무장대는 밤에 마을로 내려왔다. 쌀과 식량을 요구했고, 숙식을 강요했다. 협조하지 않으면 적으로 분류됐다.
실제로 협조를 거부한 주민이 위협을 받거나 살해된 사례가 발생했다. 마을은 둘로 갈라졌다. 낮에는 경찰과 행정이, 밤에는 무장대가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 시점에서 제주의 일상은 붕괴했다. 주민은 어느 쪽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했다. 경찰에 협조하면 밤에 위험해졌고, 무장대에 협조하면 낮에 위험해졌다. 아이와 노인, 여성에게도 예외는 없었다. 이 상황은 장기화됐다. 공포는 일상으로 굳어졌다.
정부와 치안 당국은 무장대 토벌을 결정했다. 결정 자체는 이상하지 않다. 경찰지서가 공격당했고, 공무원이 살해됐기 때문이다.
문제는 집행 방식이었다. 무장대와 주민을 구분할 정보와 인력이 충분하지 않았다. 통신은 느렸고, 현장 판단은 거칠어졌다. 특정 지역 전체가 위험 지역으로 묶였다.
중산간 마을이 불타기 시작했다. 주민들은 집단으로 끌려갔다. 무장대와 직접 관련이 없는 사람도 예외가 아니었다. 노인과 아이도 희생됐다. 무장대의 폭력 위에, 국가의 폭력이 겹쳐졌다. 이 과정에서 피해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제주 4·3을 이해하는 핵심은 두 가지다. 첫째, 경찰지서를 공격하고 총을 사용한 무장 행동이 먼저 있었다. 둘째, 그에 대한 대응이 통제되지 않으면서 민간인 피해가 폭발했다.
이 두 측면을 함께 봐야 한다. 어느 하나만 강조하면, 제주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러나 종북 좌파의 설명은 이 구조를 왜곡한다. 무장대의 공격과 살해는 거의 언급되지 않거나, “저항” “항쟁”이라는 말로 미화된다.
대신 국가의 대응만이 전면에 놓인다. 이렇게 되면 왜 총이 등장했는지, 왜 마을이 전쟁터가 되었는지는 사라진다.
여수·순천: 군대가 정치에 들어간 날
여수·순천 사건은 제주와 성격이 다르다. 이 사건의 중심에는 군대가 있다. 군대는 국가 공권력의 핵심 도구다. 동시에 가장 엄격한 명령 체계를 요구받는 조직이다. 이 조직이 정치적 이유로 무기를 들었을 때, 사회 전체가 흔들린다. 반란이다.
여순사건 관련 기록사진. [사진=여수시청 아카이브, 이경모 촬영]
1948년 10월, 여수에 주둔하던 군부대 일부는 제주 진합 투입과 관련한 상관의 명령을 거부했다. 명령을 거부한 것 자체가 이미 심각한 문제였다. 그러나 사태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무기를 들고 반란이 시작됐다.
반란군은 무기고를 장악했다. 경찰서와 관공서가 공격받았다. 우익 인사들이 체포되거나 살해됐다. 일부 지역에서는 민간인에게까지 총이 겨눠졌다.
며칠 동안 여수와 순천 일대는 통제 불능 상태에 있었다. 군인이 정치적 이유를 내세워 무기를 사용한 순간, 법과 질서는 급격히 무너진다. 반란이란 그런 것이다.
정부군이 진압에 나섰다. 여기서도 문제가 반복됐다. 반란군과 민간인을 정확히 가려낼 시간과 정보가 부족했다. 광범위한 검거가 이뤄졌고, 반란과 무관한 주민도 피해를 입었다.
이 사건도 제주 4·3 반란과 마찬가지로 반란군이 먼저 무기를 들었다. 그 다음, 국가의 대응이 거칠어지면서 피해가 확대됐다.
그러나 종북 좌파는 이 구조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다. 여수·순천은 늘 “항쟁”으로 불린다. 이 말로써 군사 반란이라는 사실을 덮은 것이다. 총을 들고 명령을 거부한 행위는 사라지고, 진압 과정의 피해만 남겨진다. 폭력의 시작점은 반란군이다.
‘항쟁’이라는 말이 만드는 왜곡
제주와 여수·순천을 둘러싼 종북 좌파의 공통된 방식은 첫째, 총이 먼저 등장한 장면을 지운다. 둘째, 이름을 바꾼다. 그렇게 되면 무장 공격은 ‘저항’이 되고, 군사 반란은 ‘항쟁’이 된다.
이름이 바뀌면, 폭력은 폭력이 아니게 된다. 왜 총이 필요했는지, 왜 사람을 죽여야 했는지, 다른 길은 없었는지는 묻지 않는다. 대신 “역사의 편”이라는 거창한 말로 모든 판단을 장악한다.
제주에서도, 여수·순천에서도, 처음 총을 든 쪽은 늘 도덕적 보호막을 얻었다. 반대로 그 폭력을 문제 삼는 사람은 ‘반동’이나 ‘적대 세력’으로 몰렸다. 말이 바뀌면서 책임의 위치도 함께 바뀌었다.
종북 좌파는 항상 말한다. “폭력은 억압이 낳았다.” 그러나 폭력은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누군가는 총을 들기로 결정했고, 누군가는 사람을 적으로 규정했다. 그리고 그 행위를 “불가피했다”는 말로 덮었다. 이 말이 반복되면서 종북 좌파의 폭력은 점점 가벼워졌다.
총이 정치에 들어오면 남는 것
제주와 여수·순천에서 확인되는 사실은 총이 정치에 들어오면, 피해는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무장대의 폭력도, 국가의 과도한 대응도 모두 비극을 키웠다. 어느 한쪽의 폭력만 감싸는 태도는 같은 일을 반복하게 만든다.
폭력은 항쟁이 아니다. 폭력은 그 자체로 폭력이다. 제주에서도, 여수·순천에서도, 총이 먼저 등장한 행위는 비판받아야 한다. 동시에 국가가 이를 통제하지 못하고 민간인을 보호하지 못한 책임도 분명하다.
해방 직후 종북 좌파의 가장 큰 문제는 단순히 북한을 지지했다는 데 있지 않다. 폭력을 정치의 언어로 감싸고, 그 방식을 정당한 행동처럼 굳혀 버린 데 있다. 그 결과로 남은 것은 해방도 진보도 아니다. 남은 것은 피해, 책임 회피, 그리고 “말보다 총이 빠르다”는 위험한 사고다.

◆ 松山
시인이자 역사·철학 연구자로 전 이승만학당 이사를 지냈으며 현재 한국근현대사연구회 연구 고문, 철학 포럼 리케이온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 네 권을 출간했으며 ‘후크고지의 영웅’을 공동 번역했다. 松山은 필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