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혜훈을 비롯한 한국 보수 정치에는 하나의 익숙한 엘리트 회전문이 있다. 그 회전문의 핵심 키워드는 늘 같다. KDI(한국개발연구원), 서울대 경제학과, 해외 유학, 서초갑, 그리고 대구다. [사진=연합뉴스]
한국 보수 정치에는 하나의 익숙한 엘리트 회전문이 있다. 그 회전문의 핵심 키워드는 늘 같다. KDI(한국개발연구원), 서울대 경제학과, 해외 유학, 서초갑, 그리고 대구.
이 조합은 단순한 이력의 나열이 아니다. 한국 보수 정치에서 가장 안전하고, 가장 실패 확률이 낮으며, 가장 레거시가 선호하는 권력 코스다.
KDI: 정치적 무결성을 가장한 권력 예비학교
KDI는 한국 보수 정치에서 단순한 국책연구기관이 아니다. 정치로 진입하기 전 ‘중립적 전문가’라는 외피를 씌워주는 가장 강력한 세탁 코스다.
이혜훈·유승민·윤희숙으로 이어지는 흐름은 우연이 아니다. KDI 출신이라는 사실은 언제나 이렇게 작동한다.
“나는 정치인이 아니라, 정책 전문가였다.”
이 문장은 책임 회피에 최적화된 정치적 면허증이다. 실패하면 “정치는 나와 안 맞았다”고 말하면 되고 성공하면 “전문가가 정치를 하면 다르다”는 신화를 획득한다.
서울대 경제학과·해외유학파: 한국형 ‘엘리트 인증 패키지’
서울대 경제학과, 그리고 해외 박사 학위. 이 조합은 한국 정치에서 여전히 비판 불가능한 권위의 상징이다.
문제는 이 경력이 현실 정치의 성과와 거의 상관이 없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늘 ‘합리적’ ‘이성적’ ‘중도적’이라는 프레임으로 보호된다.
이 프레임은 정책 실패에도, 정치적 기회주의에도 잘 찢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한국 사회는 여전히 학벌과 해외 유학을 능력 그 자체로 착각하는 구조에 있기 때문이다.
서초갑: 강남 엘리트 정치의 상징적 ‘꿀지역구’
서울 서초갑은 단순한 지역구가 아니다. 이곳은 강남 엘리트 정치의 쇼윈도다. △보수 성향이 안정적이고 △경제 이슈에 대한 이해도가 높다고 간주되며 △후보자의 ‘인간적 매력’보다 ‘이력서’를 먼저 본다
그래서 서초갑은 늘 정치적 체력은 약해도 이력은 화려한 인물들이 안전하게 착륙하는 활주로가 된다.
이혜훈에서 윤희숙으로 이어진 흐름이 상징적이다. 정치 노선이 달라도, 캐릭터가 달라도 KDI·경제학자·합리 보수라는 브랜드는 그대로 계승된다.
대구: 최후의 보험, 혹은 정치적 도피처
그리고 이 엘리트 코스의 마지막 안전장치가 바로 대구다. 서울에서 정치적 체급을 키우지 못했을 때, 강남에서 더 이상 버티기 어려워졌을 때, 이 엘리트들은 늘 대구를 정통 보수의 본산, ‘그래도 당선은 가능한 지역’으로 바라본다.
대구는 도전의 공간이 아니라 보험의 공간으로 소비된다. 그래서 이들의 보수는 언제나 지역의 삶이 아니라, 지역의 표를 관리하는 보수에 머문다.
문제는 개인이 아니라 ‘경로 의존’이다. 이혜훈이든, 유승민이든, 윤희숙이든 이들을 단순히 개인의 기회주의로만 비판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진짜 문제는 한국 보수 정치가 이 경로 외에는 다른 성공 모델을 거의 허용하지 않았다는 구조다. △현장 정치인 △지역 기반 활동가 △당원형 정치인 △비엘리트 출신 실무형 인재… 이들은 이 회전문에 접근조차 하지 못한다.
그래서 한국 보수는 늘 새 인물이 없는 것처럼 보이고, 결국 같은 얼굴, 같은 이력, 같은 언어만 반복 재생된다.
KDI·서초갑·대구·서울대·해외유학 이 다섯 개 키워드는 한국 보수가 가장 안전하게 늙어온 방식을 상징한다.
이제 묻지 않을 수 없다. 이 엘리트 회전문이 계속 도는 한, 보수는 과연 새로워질 수 있는가? 그리고 더 근본적으로, 정치는 언제까지 이력서를 중심으로 선택될 것인가.
대학교수·작가

◆ 심규진 교수
스페인IE대학교 디지털미디어학과 조교수. 전 국방부 전략기획자문위원과 전 여의도연구원 데이터랩 실장을 역임했으며 호주 멜버른 대학교 전임교수와 싱가포르 경영대학교 조교수로 근무했다. 저서에 ‘K-드라마 윤석열’ ‘하이퍼 젠더’ 등이 있다.